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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숫자를 이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

제가 초기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들어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조언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무엇이든 정량화하고, 순위를 매기고, 척도를 만들고, 범주를 나눔으로써 소통이 쉬워지고, 애매모호한 것이 명확해지고, 취약점이 드러나고, 데이터에 기반한 정당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수(number)"에 대한 권위 부여는, 숫자가 빠진 의사 소통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않고, 비과학적이며,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통계학자인 폴 굿윈의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숫자와 관련된 우리의 실수를 짚어줍니다.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데이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폴 굿윈 지음. 신솔잎 번역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데이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폴 굿윈 지음. 신솔잎 번역

전반부에서는 숫자가 잘못 쓰이거나 지나치게 강조되어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에 대해 다룹니다. 숫자, 지표, 측정치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이것을 발표하고, 공유하고, 읽고, 해석하고, 의사결정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에서 왜곡과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정말 많은 역사적 에피소드와 현실 사례들이 나옵니다. 후반부에서는 정확하고 정직한 숫자가 제시되어도, 그것을 놓치고, 외면하고, 무시하게 되는 이유와 위험에 대해 다룹니다. 

1장에서는 순위에 대해 다룹니다. 입학, 졸업, 입사, 성과 평가, 입찰, 선거, 오디션, 베스트셀러 선정, 올해의 배우 등 우리는 순위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는 많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과연 이것을 순위로 매기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였습니다. 세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대안이 있을 때, 투표권을 가진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선호 순위를 잘 반영하는 투표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특히 여러 가지 지표를 종합한 종합 순위를 매기고, 그것을 정말 중대한 곳에 활용하는 것의 문제점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 종합 순위 대신에 왜곡의 가능성이 적은 개별 척도(hot indicator)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2장에서는 프록시 지표에 대해 다룹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울 때, 대상의 속성을 반영할 것으로 보이는 간접적인 측정치를 프록시 지표라고 합니다. 프록시 자체의 타당성도 문제이지만, 지표 자체가 목표가 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것이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입니다. 폭스바겐은 배기가스 배출 기준이라는 지표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극단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조작하는 부정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프록시 지표로서 오랫동안 확고한 지위를 누려온 국내 총생산(GDP), 지능지수(IQ)에 대한 문제점, 오용된 사례들도 나옵니다.

3장에서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 문제를 다룹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평균"이라는 대표값은 사실 집단 구성원 누구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평균값을 근거로 집단의 특성을 간편하게 특징짓고, 유형화(stereotype)하는 것의 위험을 이야기합니다. 2018년에 보았던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전투기 좌석을 설계할 때, 모든 조종사들의 평균 체형을 고려하여 만든 결과, 어떤 조종사에게도 맞지 않은 좌석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쨌든, 복잡하고 다면적이고, 개별적인 개체들을 단 하나의 대표값으로 단순화해서 의사소통할 때에는 항상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평균의 종말: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평균의 종말

4장에서는 범주화(categorization)와 경계(border, boundary)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논문을 쓸 때, 연구자들은 통계적인 유의 수준(significant level)으로 피셔가 제안한 0.01 또는 0.05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영가설이 참일 때, 이런 실험 결과가 나올 확률은 5%나 1%보다 낮으니, 영가설을 기각한다라는 논리를 사용합니다. 저도 논문 쓸 때, 유의미한 극단적인 확률값이 나오면, "별이 떴다!"라고 하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5%, 1%라는 기준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임의의 경계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 합법적이거나 편법적인 방법으로 데이터를 조작하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89.5로 B 학점을 받은 사람과 90점으로 A학점을 받은 사람은 완전히 다른 범주로 분류되고 큰 차이로 지각되지만, 99점을 받은 사람과 90점으로 A를 받은 사람은 같은 범주로 묶이게 됩니다.

5장에서는 특이하게 라이프트래커, 라이프로깅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마트워치와 같이 24시간 나와 함께 하는 디바이스의 등장으로 나의 많은 신체 활동과 상태를 숫자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숫자들이 나의 다채롭고 복잡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여론 조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론 조사는 원칙적으로 무작위 샘플링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질문 상황, 답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염과 왜곡이 생깁니다. 보통은 조사 기관에서 밝히는 오차 범위보다 훨씬 큰 오차 범위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에서는 사소하게 발생할 수 변화에 대해 과도한 서사를 붙여서 여론을 왜곡하거나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언더독 효과, 밴드왜건 효과, 헤딩(herding) 효과 등 여론 조사 결과를 왜곡시킬 수 있는 심리사회적인 기제들도 많습니다.

7장은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행복도, 삶의 질, 고통의 정도 등의 지표에 대해 다룹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1위부터 후순위에 있는 나라까지 발표되면, 각 나라 정부와 정치인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순위를 해석하고, 정책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응답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는 있었던 것일까요? 순간적인 다른 변수에 의해 응답이 매우 달라질 수도 있는 불안정하고 불분명한 것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어, 소수 세째 자리로 갈리는 행복도 순위는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오픈AI의 이사진들이 지향했었다는 (피터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의 이야기도 잠깐 나옵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과 같은 이타주의를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정량화된 지표에 기반해서,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가 큰 곳에 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효율성을 타당하게 어떻게 정량화하느냐 문제가 제기됩니다.

8장은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는, 사전 확률에 대한 고려를 이야기합니다. 즉,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 이야기입니다. 검사의 오류(presecutor's fallacy) 이야기를 보니, 잘못된 확률 판단으로 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형사법정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판결이 나올 수도 있더군요. 코로나19 백신의 효과, 음주 운전자의 식별, 범죄 용의자나 테러리스트의 식별, 거짓말 탐지기의 효과와 같이 매우 민감하고, 치명적인 곳에서 기저 확률을 고려하지 않은 확률 판단에 오류가 생길 경우, 그 여파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9장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제시되어도 우리의 기존 신념에 반하는 경우, 왜 우리는 그것을 종종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다룹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사전 확률을 0 또는 1로 놓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어도, 우리의 믿음을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교육 수준이 높거나 과학적인 사고를 훈련받은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어 노벨병(Nobel disease)라고도 불립니다. 또, 역화 효과(backfire effect)는 기존 믿음을 반박하는 사실(예: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다!)이 나와도, 기존 믿음이 오히려 더 견고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때로는 집단이 객관적인 정보를 무시하고, 집단 사고(group thinking)에 빠질 경우, 케네디 대통령의 쿠바 피그스만 침공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에서 보듯이 극단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부산 엑스포 유치에 대한 과장된 기대와 유치 실패의 원인을 집단사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10장에서는 과장된 공포 마케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가지 지표들은 현대 사회가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것은 낮은 확률이지만 극적으로 보이는 비행기 사고, 끔찍한 흉악 범죄들입니다. 공포를 조장해 이득을 보는 세력들과, 부정적인 뉴스에 더 주의를 쏟게 되는 우리의 뇌가 함께 작용하여 세상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미래는 더 어둡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포 마케팅은 언론, 기업, 종교, 선동적인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여, 때로는 잘못된 투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정확한 숫자와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메시지가 나오게 된 동기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11장에서는 통계적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의심스런 통계치나 숫자를 대할 때에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시스템 1 사고)과 함께, 느리고 깊게 생각해보는 시스템 2 사고를 병행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보가 한결같이 편향되어 있어도, 일관성이 있고, 명쾌하게 일치할 때 우리는 타당하다는 착각(타당성 착각, illusion of validity)에 빠진다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책의 내용의 주요 부분을 인용 부호 없이 거의 인용, 요약해버렸습니다. 그만큼 곱씹어보고 싶은 내용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책은 서점에서 "자연과학", 수학 관련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숫자가 많이 나오지 않고도 숫자 이야기를 쉽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사실, 숫자를 만들고, 가공하고, 조작하고, 읽어들이고, 해석하고, 공유하고, 적용하는 인간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심리학 서적입니다. 2023년을 시작할 때 서강대학교 하영원 교수의《결정하는 뇌》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많은 의사 결정(decision making)을 해야 하는 우리 인간은, 매우 많은 실수를 하고, 합리적이지 않고, 편향에 휘둘린 결정을 합니다.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숫자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제한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또 드러난 숫자 뒤에 숨겨진 숫자와 의도, 의미를 파악하려고 더 노력하면, 조금은 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결정하는 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결정하는 뇌

2023-11-24

자이언트 임팩트, Those were the good old days!

KBS 박종훈 경제 기자가 쓴 《자이언트 임팩트》를 읽어보았습니다. 원래 자이언트 임팩트 또는 테이아 가설로 불리우는 이 용어는, 45억년 전에 지구가 화성만한 크기의 테이아와 충돌하여 달이 탄생했다는 유력한 과학적 가설입니다. 저자는 그것에 견줄만한 세계 경제의 커다란 변화와 충격 4가지를 거론하며,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의한 글로벌 분업 시대, 초저금리 시대,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던 시대, 고성장 시대는 이제 지나간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과거 30~40년의 경제 작동 방식을, 앞으로도 비슷하게 적용하여 예측을 한다면 틀린 예측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자이언트 임팩트. 박종훈 지음
자이언트 임팩트. 박종훈 지음.

그 네 가지 자이언트 임팩트는 인플레이션, 금리, 전쟁, 에너지입니다. 경제학적 기본 지식이 없는 저같은 사람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해놓았습니다. 책의 내용을 여기에 요약하는 것은 저의 능력 밖의 일이라서, 각 항목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적어봤습니다.

첫 번째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특별히 물가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장기적인 저물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이유로, 미국이 움켜쥔 세계의 패권에 따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원활하게 이루어진 분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갑자기 찾아온 공급망의 문제,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고물가에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리고, 우리 나라는 정부가 물가를 인위적으로라도 잡으려고, 가히 관치 경제라고 할 만큼 깊게 개입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플레이션이 과연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로 이제 더 이상 물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좋던 시절(the good old days)은 다 지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물건의 값인 물가에 이어, 돈의 값인 '금리'가 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이례적으로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미국 연준이 빅스텝, 자이언트 스텝이라 불리는 금리 인상을 연속해서 단행하고, 이제 언제 기준 금리를 동결할 것인지가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처럼 저금리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높은 저축률에서 비롯되었던 풍부한 자금이 줄어들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다시 올리는 것을 검토해야 합니다. 게다가 고령화로 인한 자금 시장의 변화,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리스크가 저금리를 계속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경제 뉴스를 볼 때마다, 금리와 다른 경제 변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저같은 경제학 맹에게는 항상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금리와 채권 가격의 관계 같은 것 말이죠. 어쨌든 그동안 저금리 현상에 잘 적응하여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이용한 과거의 투자 전략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게 되어간다고 할 수 있겠네요.

세 번째는 바로 전쟁입니다. 미국이라는 원톱 초강대국 체제의 세계 패권이 이제 미국과 중국이라는 투톱으로 바뀌고, 거기에 유럽, 동아시아의 신흥국, 에너지 패권을 쥔 러시아, 중동 나라 등이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직접적인 무력 도발인 전쟁, 또는 패권 전쟁, 공급망 전쟁, 기술 전쟁, 국지 전쟁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정말로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었지요. 게다가 그 전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계속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또는 하마스)간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은 당사국 국민들에게는 당연히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그 여파는 에너지, 식량, 인플레이션 등으로 전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쟁을 대하는 나라들의 이해관계도 단순하지가 않아서, 이제 나라들도 각자도생, 개인들도 각자도생의 시대가 오며, 예측 가능성은 낮아지고, 변동성은 매우 커지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언급된 것이지만, 결코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에너지'입니다. 한 때, 원유 고갈에 대한 대안으로 셰일 가스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주목받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셰일 가스가 발견되면서 미국은, 중동이나 러시아와 같은 원유 생산국에 대한 의존과 간섭을 줄이려고 했었죠. 그러나, 셰일 가스가 여러 이유로, 미국이 바라는 대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을 잘 못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독재자라고 비난했던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를 찾아가 원유 생산을 늘려달라고 싹싹 빌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우디와 중동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이란은 미국과 핵 합의 복원을 하려고 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전쟁과 핵무기 기술 확보 등의 여러 가지 변수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유럽은 어떻습니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에 크게 의존했던 천연가스 공급이 어려워지자, 겨울 난방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또,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하려고 해도, 발전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은 대부분 중국이 키를 쥐고 있습니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풍부한 화석 연료 에너지를 활용해서, 고성장을 이룩했던 시대는 또 하나의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불확실성과 변화만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미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시대에 변화를 읽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고, 거기에 국가, 사회, 개인이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십시오.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 알아두면 반드시 무기가 되는 맥락의 경제학. 서영민 지음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 알아두면 반드시 무기가 되는 맥락의 경제학. 서영민 지음

이전에는 서영민 기자의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충격 이후 급하게 변화하는 세계 경제를 변화시키는 여러 가지 현상과 요인들, 특히 반도체 문제, 인구와 기후 위기, 빈곤의 문제 등을 포함해 깊게 파헤치는 책이었습니다. 기자란 모름지기 발생하는 "피상적인 사건에 숨겨져 있는 고구마 줄기와도 같은 원인들을 깊게 파헤쳐 분석해주는 역할을 하는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도 같이 보면, 거시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023-11-11

스마트폰에 중독된 현대인을 위한 책, 호모 아딕투스

호모 아딕투스: 알고리즘을 설계한 신인류의 탄생. 김병규 지음.

김병규 교수가 쓴 《호모 아딕투스》를 읽어보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새로운 경제 메카니즘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물건 자체가 귀하던 제품 경제의 시대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관심 경제의 시대, 이제는 알고리즘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하염없이 붙잡아 둘 수 있는 중독 경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중독 대상은, 고통이 따르는 지출을 동반하거나, 일상적으로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심각성이 좀 덜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쇼핑, 뉴스, 게임, 쇼셜 미디어, 유튜브 등은 많은 경우 공짜이기도 하고, 매우 적은 노력으로 손 안에서 바로 실행 가능한 점이 다르다고 합니다. 게다가 내 손 안의 현금이 줄어드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카드 결제, 앱 안에서의 포인트 사용 방식으로 지출을 하면, 소비할 때 느껴지는 고통이 훨씬 덜하다고 합니다. 많은 데이터를 가진 빅테크 기업들이 정교하게 짜놓은 알고리즘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사실은 보여지는 것을 계속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거대 기업들의 정교한 낚시에 걸려 점점 대상에 중독되어 가면서도,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됩니다.

저 자신을 한 번 돌아봅니다. 나는 무슨 중독에 빠져있을까? 다행히도, 저는 게임이나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때 뉴스에 강박적으로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에 몰입하거나, 진지한 독서를 못 하게 하는 가장 큰 훼방꾼은 뉴스였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언제든지 확인 가능하고, 끝없이 업데이트되고,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식이 가득한 뉴스를 계속 확인하게 되는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물론, 뉴스를 전혀 모르고, 현 사회를 살아가기는 힘들지만, 나에게 아무런 연관도 없고, 쓸데도 없는 "최신" 뉴스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분명히 좋지 않았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좋아요"라는 간헐적 보상도 있지만, 올라오는 소식의 "최신성"이 더 중독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다른 공부를 하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내내, 포털 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최신 뉴스를 확인하고 나면, 너무 허무했습니다.

책에서는 중독 경제 메카니즘을 잘 이해하고, 거대 기술 기업들이 주도하는 중독 경제 세상에서, 소규모 비즈니스 주체가 살아남는 전략을 몇 가지 제시합니다. 마이크로 어딕션(micro-addiction) 전략은 비교적 작은 스케일로 중독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예로 10대들이 좋아하는 틱톡,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소셜 미디어 레딧, 고도의 큐레이팅이 들어간 쇼핑몰 29CM 등의 사례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딕션 프리(addiction free)전략입니다. 이 전략을 적용한 비즈니스 사례로 결심을 실행하게 도와주는 챌린저스, 광고 없이 고품질의 글이 유통되는 플랫폼 미디엄 등을 제시합니다. 그 외에도 책을 읽어보면, 더 세분화된 비즈니스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후반부에서는, 중독 경제 시대에 중독에 빠지지 않고, 현명하게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광고를 꺼놓는다든지, 스마트폰의 알람을 꺼놓는다든지, 소비를 미루는 습관을 들이는 것 등을 제시합니다. 나아가, 중독 경제 시대를 이끌어가는 데에 필요한 인재상과 역량을 제시합니다.

책에는, 갤럽이 시행한 한 관찰과 행동 분석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이 평균 3분 5초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소개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업무를 방해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23분 15초가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뉴포트는 멀티태스팅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생산성은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딥 워크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한다면, 의도한 일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딥 워크: 강력한 몰입, 최고의 성과. 칼 뉴포트 지음. 김대훈 옮김.

중독 경제 메카니즘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고, 전략입니다. 그 안에서 비즈니스 주체로서, 또는 일의 주체인 개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해 책과 함께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2023-10-19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림이 있는 동화책, 《책과 노니는 집》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 김동성 그림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 김동성 그림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읽어보고, 내용과 단어가 너무 어렵다고 하여, 도움을 주기 위해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제9회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니 어떤 작품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야기의 배경은 조선 후기 천주학이 학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에 서울입니다. 주인공 장이는 책을 필사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아버지와 살고 있는 어린 소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천주학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죽도록 맞아, 소년은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모진 놈들......

아버지에게 일감을 주었던 책방 주인 최 서쾌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보편적인 사람의 상식과 정서에서 아버지는 죄 없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탄식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국가가 보았을 때 죄가 됩니다. 그러나 통치자가 만들어놓은 합법의 테두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설사, 그 시대 기준으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을만큼 맞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있다고 신체적인 형벌을 주는 일, 그리고 사람의 목숨까지 국가가 빼앗아가는 일이, 현대 사회에서는 이제 많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 걸까요.

국가의 정책, 지배자의 통치 방향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선 말기에 천주학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었다고 의심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을 접한 사람들은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엄격하게 계급이 구분되어 날 때부터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구분되는 신분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따라가지 못한 국가는 가혹한 탄압을 행합니다. 왕조 시대와 식민지 시대를 거쳐서 민주 공화국이 되고, 절대적인 통치자, 왕에 의한 지배에서,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 사회가 된 우리 나라! 정말 많이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 정의, 평등, 인권, 사상의 자유 등 인간의 이상을 반영하지 못한 상태에서, 법 통치자에 의해 잘못 휘둘러지는 경우는 없는지도 생각해봅니다. 

혼자였던 장이를 도와주는 사람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최 서쾌의 도움으로 필사한 책 배달을 하게 된 소년, 장이. 이번에는 동네 불량배인 허궁제비에게 큰 괴롭힘을 당하고 난처한 처지에 빠집니다. 가족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장이는 혼자서 끙끙대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장이는 고립무원의 약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없는 장이에게 일터를 주었던 최 서쾌, 도리원에서 만난 낙심이, 청지기 아저씨, 미적 아씨, 지물포 주인 오씨 등이 모두 합심하여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 서쾌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감당할 수 없거든 도움을 청하란 얘기다....... 휴우.

도움을 제공한 장이

관아에서 다시 천주학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잡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그동안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장이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홍 교리에게 장이가 큰 도움을 제공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외로운 현대인들은 각자 도생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장이는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복을 가졌습니다. 국가 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거대한 과거 왕조 시대로 결코 돌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 외면하지 않는 것이 조상들의 보편적인 정서였다면, 현대인으로서 그런 옛날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마무리

소년 장이의 성장 소설일 수도 있고, 조선 후기의 역사 소설일 수도 있습니다. 장이라는 순진한 어린이의 시선을 따라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책읽기를 권장하는 어린이 문학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성격을 다 갖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과함이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많이 보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역사가 너무 도드라지지도 않으며,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알차게 꽉 차 있지만, 이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각자의 생각과 느낌,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아주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와 한 몸이 된 듯한, 아름답고 따스한 삽화가 없었다면, 책읽기의 즐거움이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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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4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균열,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작가의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작가의 마당이 있는 집


현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소설을 든다. 소설에 빠져들며, 현실의 아픔을 잠깐 잊고 싶어서. 이번에는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 소설. 운명이 다른 두 여자의 가정이 무너져가는 이야기가 짧은 며칠 사이에 극적으로 전개되며 쉽게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2023년 나의 현재의 암담한 상황과 소설 속의 상황이 자꾸 오버랩 되면서 읽는 동안 계속 깊은 계곡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보통은 사실이 상당히 나중에 밝혀지는 반면, 이 작품은 중간중간에 두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사실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게 되므로 추리물은 아니다. 그러나 끝까지 결말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써본 작가의 소설적 재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완벽해 보이는 의사 남편을 둔 김주란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미묘한 균열을 세밀하게 그려지고, 아마 그런 점에서 공감이 가는 부부들도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편은 아내를 자상하게 보호해주는 것 같고, 아내는 그의 틀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김주란이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그냥 미안하다, 그만하자로 대충 마무리해버리는 남편의 모습.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갖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아내, 김주란의 모습. 그냥 참고 넘기면 그냥 계속 평온할 지도 모를 관계에서 조그마한 균열이 파국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다. 완벽한 가정이란 이 세상에 없는 것인가? 괜찮아 보이는 가정, 그리고 처음부터 문제가 있어 보이는 두 개의 가정의 모습을 보고, 이 세상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가족의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이상적인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같은 제목을 가진 드라마로도 작품화되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김진영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저,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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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8

나의 과학적 지식 수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책표지

나는 수학이나 과학을 싫어하거나 크게 겁내지는 않았다. 내가 궁금해하는 문제에 대해 과학적 사고를 하는 법과 과학적 원리를 모르는 내가 답답해, 대학교에서도 공대의 음향학 수업을 듣거나, 다른 과에 가서 미적분학, 미분방정식 등 수학,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을 찾아들었다. 최근 몇 년을 돌이켜봐도, 미적분의 힘이나, 뇌과학의 모든 역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와 같은 교양 과학 서적들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유시민 작가의 책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보면서, 한참을 반성했다. 정말 과학적인 기초 사실들에 대해 내가 이렇게 대충대충, 건성으로 들어만 본 것을 아는 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표적인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생물이 진화한다는 진화론에 대해 나는 너무 무지했었다. 생존에 유리한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유전자에 어떻게 반영된다는 것인지 너무 몰랐었다. 

우주의 탄생, 그리고 그것이 현재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원자핵과 전자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앞으로 우주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이제야 조금 손에 잡힐 듯이 이해하게 되었다. 

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의 과학적 발견들을 탐색하며,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인문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하나하나가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스스로 "거만한 바보"를 겨우 벗어난 "문과" 남자라고 칭한 저자는 훌륭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쓴 수많은 과학 교양서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어떤 커뮤니케이터보다도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참고했던 책들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훌륭한 과학 교양서들이다. 이 목록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다. 코스모스, 원더풀 사이언스, 세계를 바꾼 17가지 방정식,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엔드 오브 타임, 원소의 왕국, 사회생물학 대논쟁, 통섭: 지식의 대통합,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불확실성의 시대, 김상욱의 양자 공부, 세상의 모든 수학,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어느 수학자의 변명 등 그 중에 몇 가지만 나열해도 풍부한 추가 읽을 거리가 생긴다. 

인상깊었던 부분은 나열할 수 없이 많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장에 나온 수학에 관해서 영국 수학자 하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수학과에 가면 도대체 논문을 어떻게 쓸까? 수학과에 가는 그 많은 사람들이 수학적인 발견을 하나씩 해내어 논문을 쓰는 걸까? 하디는 산술, 대수학, 유클리드기하학, 미적분학, 공학, 물리학, 경제학, 사회과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수학은 세상에 유용하게 쓰인다. 그런데 현대의 기하학과 대수론, 정수론, 집합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아름다운 "진정한 수학"이지만, 세상에 쓸모가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런 이분법은 맞지 않다. 상대성 이론이 없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내비게이션만 해도 엄청난 오차 때문에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유시민 작가는 다른 과학과는 다르게, 소위 "진정한 수학"을 하는 수학자들은 "인간계"가 아닌 "신계"에 속한 사람들 같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천재 수학자 가우스를 예로 들면서. 

학교 다닐 때, 수학 좀 잘 한다는 사람들은 수학에 많이 의존하는 과학을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이, 새로운 "신계"의 수학적 발견을 해낸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인가 보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몇몇 과학자들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충분히 밑줄 치고, 메모하면서 보지 못해 아쉽다. 책 반납일을 단 며칠 앞두고 펼치기 시작해서 다 볼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하지만 너무 속도감있고 재미있게 책장을 넘길 수 있어서, 그건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인문학과 과학이 만나서 어떻게 세상의 문제들을 설명해가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에서 여정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돌베개]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돌베개,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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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

클루지: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클루지: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저자 개리 마커스(Gary Marcus)는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입니다. 많은 심리학적 발견들은 인간의 뇌 활동이 많은 오류와 편향(bias)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을 하죠. 개리 마커스는 우리 몸에 진화적인 관성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신체 구조가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뇌에도, 비합리적이거나 잘못 설계된 흔적들 투성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뇌가 관장하는 우리의 기억, 신념, 의사 결정과 선택, 언어, 행복과 쾌락의 추구 과정에도 불합리하고, 엉성한 측면들이 많다는 것이죠.


다니엘 카네만이 구분했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시스템 1 사고와, 의식적이고 통제된 숙고를 하는 시스템 2 사고 비슷한 개념이 나옵니다. 아주 오래된 인류 진화의 산물인 반사 체계(선조 체계)와 비교적 최근에 진화하여 좀 더 합리적인 처리를 하는 숙고 체계를 구분합니다. 이 두 체계의 갈등에서 많은 경우, 사람들이 반사 체계가 우선적으로 작동하여, 클루지스러운 기억, 신념의 형성, 의사 결정,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동기에 의한 추론(motivated reasoning), 점화 효과(priming effect),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 후광 효과, 언어의 불완전성 등이 대표적인 클루지로 소개됩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이지는 않지만, 제가 인상깊게 보았던 몇 가지 클루지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생생하고, 개인적이고, 일화적인 기억


여러 사례가 개입되고 통계학적으로 뒷받침되는 다른 정보보다, 내가 개입되거나, 나의 경험이 들어가 있는 일화적인 기억을 우선시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원에서 나온 보고서는 종합적으로 A 상품이 더 좋다고 하는데, 어떤 한 사람의 일화에서 A상품이 결함이 있어서 B 상품을 추천한다고 하면, 결국 내가 상품을 선택할 때 생생하고 일화적인 것에 굴복하여 B를 선택할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나의 특수한 경험은 사례 수가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을 일반화하여, 나중에 의사결정이나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는지 조심해야겠지요.


스피노자의 가설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정보를 이해와 동시에 (먼저) 받아들이고 ...... 틀린 정보는 ... (나중에야) 물리친다"고 말하였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심리학자 길버트는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해을 받을 때, 거짓 명제를 받아들이는 빈도가 증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게 하찮아보이지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아동 포르노물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미국의 한 정치인은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입은 손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법률에서는 '유죄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는 것이 문제랍니다. "당신이 열두 살 때부터 포르노 잡지를 읽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이런 식으로 질문만 받아도 그것을 사실로 믿기에 충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사실로 믿기 전에 의도적으로 의심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우리의 마음은 가까운 것과 먼 것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가까운 것은 더 구체적으로, 먼 것, 먼 미래는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구 온난화는 2050년에야 현실로 다가올 먼 미래라고 생각할수록, 현재에 나의 행동과 대처에 아무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가까운 것과 먼 것에 대한 생각을 균형있게 해야 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잠시 기다리기'를 택할 수 있습니다. 비합리성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반면에, 복잡한 결정은 시간을 두고 그것에 몰두할 때 가장 훌륭하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책이 번역된 시기가 2008년이니 꽤 오래 전에 나왔네요. 저자 개리 마커스는 책에서 인터넷에 각종 정보가 넘쳐나던 당시를 '폭로된 진실'의 세계라고 칭하며 아이들이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절대적 진리로 쉽게 믿어버릴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대립되는 증거들을 평가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성형 AI가 나온 2023년 현재에도 매우 유효한 주장입니다.


내친 김에, 저자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니, 2016년에 우버(Uber)에 인수된 지오메트릭 인텔리전스(Geometric Intelligence)라는 머신러닝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였네요. 2019년에는 로버스트에이아이(Robust.AI)를 설립했다고 하구요. 그리고 최근에 나온 TED 비디오에서 그는 생성형 AI가 허위 정보를 퍼뜨릴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AI의 두 가지 전통적 접근법(심볼릭 접근법과 연결주의 접근법, 즉 오늘날의 신경망)을 보완적으로 사용하여 허위 정보 생산의 위험성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서로 대립하는 오늘날, 우리가 불완전하고, 클루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 좋은 해결책을 찾기 위한 출발점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결점과 클루지를 이해하고, 겸손한 자세로, 더 현명한 판단과 선택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합니다.

[갤리온]클루지 :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리커버 에디션), 갤리온, 개리 마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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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개인용 무료 클라우드 저장소 비교

클라우드 스토리지

예전에 Microsoft 365 Family를 쓰다가, 모든 구독 서비스를 포함해, 들어가는 돈을 아끼기 위해 무료 버전으로 전환하였다. MS 오피스 프로그램은 리브레 오피스구글 드라이브에 있는 앱들로 아쉬운대로 대체하였는데, 클라우드 스토리지 1TB가 갑자기 5GB로 줄어서 그동안 보관해두었던 문서들을 어디로 옮겨야 할 지 난감하였다. 물론 전체 파일은 대략 10G 정도 되어서 무지막지하게 많지는 않다.

할 수 없이 여러 개의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나눠서 저장하기로 하였다. 많이 쓰이는 개인용 클라우드 스토리지 특징들을 아래 표에 정리해보았다.

개인용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 비교 (무료 플랜에 한해서)

서비스 제공하는 용량 특징
구글 드라이브 15GB 구글 독스, 스프레드시트, 프레젠테이션, 폼, 포토, 지메일 등의 용량을 다 합쳐서 계산. 데스크탑용 드라이브  있음.
원드라이브 5GB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는 보통 랜섬웨어에 대비한 백업용으로 기본값으로 지정되어 있음. 온라인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폼, 그리고 원노트를 사용할 수 있음.  데스크톱용은 윈도우와 맥에서 사용 가능.
드롭박스 2GB 데스크톱인 윈도우, 맥, 리눅스는 물론 안드로이드, 아이폰 등 지원.
iCloud 5GB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팟 터치, 맥에서 사용 가능. 아이클라우드 사진 스트리밍 기능
네이버 MYBOX 30GB 맥과 윈도우용 데스크톱 앱 있음. 데스톱앱의 안정성은 좀 떨어짐.
Box 10GB 윈도우, 맥, 리눅스, 안드로이드, 아이폰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사용. 파일 공유, 파일 관리, 파일 암호화 기능 등

개인적으로 네이버 서비스는 거의 쓰는 게 없어서 약간 망설여지긴 하는데, 그래도 가장 용량이 많은 네이버 MYBOX를 메인으로 몇 개의 저장소에 종류별로 파일들을 정리해야 겠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다른 클라우드 저장소를 쓰면, 그들간에 파일 이동이 꽤 문제가 된다. 한 곳에서 한참 다운로드 받고, 다른 곳에 한참 업로드 해야 하니까. 아니면 동시에 한 폴더를 동기화(?) 하든가, 뭐 그런 비슷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래서 다시 여러 클라우드 저장소 사이에 파일 복사, 이동을 조금은 더 쉽게 해주는 서비스들을 찾아보았다. 먼저 구글 검색을 해서 주로 어떤 서비스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 서비스들 사이의 특징을 바드에게 비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개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사이의 파일 이동 서비스 비교 (무료 플랜에 한해서)

서비스 지원/연동되는 클라우드 저장소 무료 저장공간전송속도
UnifiDrive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2 GB Up to 200 MB/s
CloudFuze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Azure, FTP, SFTP, WebDAV, Google Photos, iCloud, Backblaze B2, Wasabi 5 GB Up to 100 MB/s
MultCloud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Azure, FTP, SFTP, WebDAV, Google Photos, iCloud, Backblaze B2, Wasabi, MEGA, pCloud, HiDrive, Sync.com, Yandex Disk, pCloud Crypto, IceDrive, ADrive, Google Workspace, Zoho Docs, ShareFile, Egnyte, IDrive, SugarSync, Cubby, LiveDrive, SpiderOak, Barracuda 10 GB Up to 100 MB/s
Cbackup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1 GB Up to 100 MB/s
Cloudsfer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5 GB Up to 100 MB/s
cloudHQ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Google Photos, iCloud 2 GB Up to 100 MB/s
odrive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5 GB Up to 100 MB/s

사실 여기서 좀 더 자세하게 바드에게 질문해볼 수도 있는데, 각 서비스들의 세부 특징을 사이트 들어가서 좀 더 살펴본 결과, cloudHQ가 무료 클라우드 앱 사이에 데이터를 무제한 동기화 시켜준다는 점이 괜찮아 보였고, 사용법도 무난한 것 같아, 일단 낙점했다.
사실 소량의 비용을 지불하고, 구글 드라이브나 원드라이브 같은 서비스를 쓰면 크게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인데, 무조건 무료 플랜으로만 비슷한 목적을 이루려다 보니 일이 좀 복잡해졌다. 그래도 무조건 비용을 줄여야 하니까...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도 조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1-06-01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신현호 저.

제목이 약간 도발적이다. 너희들은 감으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인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이 대략 1년 쯤 전이었던 것 같다. 한참 데이터 관련 책들을 모두 읽어보자고 작심하던 때였다. 박형준의 『빅데이터 빅마인드』, 스타벅스의 데이터 과학자 차현나가 쓴 『데이터 읽기의 기술』,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연세대 산업공학과 임춘성 교수가 쓴 『멋진 신세계』,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가 쓴 『증거의 오류』, 한양대 경영대학 장석권 교수가 쓴 『데이터를 철학하다』 , 구글 데이터 과학자의 『모두 거짓말을 한다』 등을 보았다.

그 중에 증거의 오류와 데이터를 철학하다는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집어던졌다. 가장 재미있게 본 두 권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와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였다. 전자는 구글의 검색 데이터만 가지고도 많은 사회 현상을 설명/예측할 수 있는 경제학자 출신 데이터 과학자의 통찰이 빛났었다. 후자의 책 역시, 경제학자 출신의 데이터 과학자가 데이터로 설명력을 높여주는 여러 가지 인간 집단의 특성과 사회적인 현상을 바라보는 틀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고 인사이트를 주었던 책은 『빅데이터 빅마인드』, 데이터 과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어 잔뜩 기대했지만 별로 기대에 차지 않았던 책은 『데이터 읽기의 기술』이었다.

경제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관심사들이 결국 심리학자들의 관심사와 얼마나 중첩되는지 엿보게 된 것 같다. 세상 일에 관심을 갖는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찰한다. 그 데이터는 결국,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을 집합적으로 모은 것이고, 그 안에는 인간 행동의 원리, 심리학의 관찰과 실험 데이터가 들어있다. 마치 데이터라는 다리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여러 학문들이 만난다고나 할까.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보자.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온 곳에서는 다음에도 당첨자가 또 나올까? 지금까지 슛을 많이 넣은 농구 선수는 다음 번에  슛을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일까?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 확률은 낮아질까? 전염병 예방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사망할 확률보다 전염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훨씬 높은데 왜 어떤 사람들은 백신을 안 맞으려고 할까? 유전무죄는 실제 법정에서 판결 결과로 나타날까? 딸을 가진 아빠들은 더 페미니스트 성향을 갖게 될까? 국회의원이나, 이사회에 여성 할당제를 실시하면 능력이 안 되는 여성들이 더 등용될까? 월드컵 기간에는 심장 마비로 인한 사망률이 더 높아질까? 1인1투표를 통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동등한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일까? 왜 백화점/인터넷 할인가는 9,900원과 같은 9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가? 잘 생긴 사람이 선거에서 뽑힐 가능성이 더 높을까? 정부 정책은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담배세를 얼마나 올려야 국민 건강에 이득이 될까? 중년의 위기는 실존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재미난 질문들에 대해서, 단순히 주장이나 당위가 아니라, 데이터를 증거로 답을 찾아간다. 그 데이터들은 때로는 통제된 실험실의 데이터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응답 데이터이기도 하고, 시장이나 주가를 분석한 데이터이기도 하고, 오랜 기간 축적된, 또는 추적하거나, 관찰한 데이터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는 휴리스틱(heuristic, 발견법)이라는 간편하고 훌륭한 의사결정 기제가 있다. 그러나 휴리스틱은 종종 많은 편파와 오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증거와 데이터에 기반해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세상의 다양한 데이터를 어떻게 바라보고, 수집하고, 끌어와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모범 사례들을 접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2021-05-22

기존 의학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우리 몸이 세계라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글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SF작가 김초엽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보건학자이고 전공이 역학(epidemiology)라고 합니다. 역학이 무엇인지는 최근에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알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의학이 개인의 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공중보건학, 그 중에서 역학은 개인의 몸과 질병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좀 더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학문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여성들이 왜 오히려 스트레스 수준이 더 올라갔을까요? 적절한 실내 온도는 21도인가요?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여, 상시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노출되는 건강의 위협, 혈액형과 인종이라는 가짜 과학이 어떻게 차별과 지배의 도구로 쓰였는지, 담배 회사에서 만든 연기 없는 세상(Smoke-Free World) 재단 이야기 등 정말 흥미롭지만, 아픈 의학과 과학의 역사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사실이나 진실로 믿어졌고, 의심 받지 않았던 인간의 몸을 둘러싼 지식들이 어떻게 잘못 생산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생산되지 않았는지 이야기합니다. 요즘 코로나19 백신의 지적 재산권 면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책에서는 그에 앞서 왜 말라리아와 같이 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질병에 대해 신약 개발이 적게 이루어졌는지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중세 서양 의학의 최고 권위자로서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전 받지 않았던 갈레노스 해부학에 대해, 관찰과 데이터와 실험을 통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당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눈으로 보이고, 쉽게 느껴지는 직관에 대해 의심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에서, 인류는 진보하였고, 과학은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을 통해 우리가 함부로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흑인, 여성, 동양인, 중국인을 구분지어 차별하고 낙인찍는 것이 사실은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자들도 약을 꾸준히 먹어 체내 바이러스 농도를 일정 수준 미만으로 떨어뜨리면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HIV 감염인들의 자살은 같은 연령 비감염인보다 10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질병에 대한 비과학적인 혐오와 낙인 때문입니다. 코로나19에 걸린 환자들에게도 혹시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 못한 사람, 사이비 종교에 빠져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쉽게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소수자가 됩니다. 토드 로즈 교수의 《평균의 종말》에서 이야기하였죠. 전투기 좌석을 설계하는 데에 "평균적인 체형"에 맞추면 아무도 맞지 않는 좌석이 나온다고.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이게 "정상"적이고, "평균"이며, "표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우리 몸은 여러 측면에서 다르고, 그것이 비난받고 차별받을 이유는 아닙니다.

2021-05-09

과학자가 쓴 과학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문학의 숲 222회 편지를 보고, 읽어보았습니다. 신뢰하는 사람들이 선택하거나 추천한 작품은, 선택을 후회할 가능성이 낮아서...

처음에는 장편 소설인 줄 알고, 첫 번째 작품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이어 <스펙트럼>으로 들어가면서, 도대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가 한참 고민했었습니다. 전자책으로 볼 때마다 느끼는 문제점이죠. 작품 전체가 잘 안 보이고, 지금 화면에 뜬 페이지의 텍스트가 전부로 보이는 것. 

SF 소설이 현실을 그린 소설과 달리, 현실적인 모순과 제약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주 정복, 우주 전쟁과 같은 다분히 남성 취향일 것 같은 미래 과학 소설 속에 장애인, 비혼인, 동양인 여성, 사이보그와 같이, 주류가 아닐 것 같은 등장 인물들의 시각으로 미래 세상, 지구를 벗어난 우주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설집이 제목으로 쓰인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냉동 수면 기술을 발전시킨 160세가 넘은 노인 과학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따라갔는데, 그게 아니어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전형적으로 과학, 공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이 많은 노인으로 나온다면, 당연히 흰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일 것이라는 고착화된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이 외계 행성에 갈 수 있고, 인간의 특성들이 "개량"되어 완벽에 가까워지고, 감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죽은 사람의 뇌를 시뮬레이션하여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요? 그런 세상에서 "완벽"하지 않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요? 김초엽의 흥미있는 우주 탐험, 뇌 탐험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2021-04-25

가짜 뉴스의 심리학

 

가짜 뉴스의 심리학: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믿기 쉬운 (박준석 지음)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극단적인 진영간의 대립은 전례없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진영의 대립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가짜 뉴스를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왜 간단한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가짜 뉴스에 빠져드는 것일까? 지능이나 지식이나 판단력이 부족해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런 위험성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심리학과 데이터 과학에 기반하여 보여준다.

가장 널리 알려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 부합하는 정보만 걸러서 처리하는 것인데, 소셜 미디어의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을 통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그런 편향이 더 강해지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인간이 지닌 여러 가지 한계가 언급된다. 인지적 자원을 쓰기 싫어하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성향, 다니엘 카네만이 말했던 시스템 1과 시스템 2 사고 경로, 기계 학습에서 말하는 과적합(overfitting)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음모론, 동기화된 논증(motivated reasoning),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 수면자 효과(sleeper effect), 거짓 진실 효과(illusory truth effect),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에 나오는 사전/기저 확률을 무시한 판단 등등등. 이제는 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가장 점수가 높았다던 MIT 학생들도 100점 만점에 73점의 점수밖에 획득하지 못했다는 CRT 문제(cognitive reflection test)를 주위 친구들에게도 던져보고 싶다. 깊이있는 사고를 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것 필링(gut feeling, 직감?)으로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지... 

책에서 나온 4·15 부정선거 음모론의 백미는 동기와 정서가 강력하게 작용하였을 때, 소위 말하는 전문가 또는 유사 전문가들도 가짜 뉴스 생산에 일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에서의 지역별 득표율을 마치 주사위를 여러 번 던지는 독립 사건처럼 취급하여, 2의 424승분의 1의 확률로 발생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이 발생했다는 물리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비슷한 논리의 부정 선거 음모론은 진보 진영에서도 일어났다. 지금까지 일어난 과거의 현상을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 때에, 현실에 없는 전제를 너무 많이 깔고, 복잡하게 튜닝하는 것이 오히려 설명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미래에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비현실적인 전제에 기반한 음모론, 결국에는 가짜 뉴스가 될 수 있다는 것! 지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저자는 말미에 전문가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미국에서 앤서니 파우치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 소장이 코로나 음모론과 백신 음모론으로 어처구니 없는 공격을 받는 것을 생각하면 전문성 또는 전문가에 대한 신뢰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전문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도 있었다. 내 생각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1990년대 일인데, 손으로 책을 읽는다는 초능력 소녀에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속아넘어가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달려들었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그것의 절정은 세브란스 병원 의사들이 그 소녀의 뇌파를 측정하면서 실제 책을 읽을 때의 뇌파와 동일하게 나온다며 놀라워하던 일이었다. 두 번째는, 황우석 사건이 발생했던 초기에,국보급 과학자였던 황우석에게 내가 감히 어떻게 도전하느냐며 그를 옹호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국가적인 이익을 앞세워 황우석을 추종하는 경향이었다. 

누구나 가짜 뉴스에 속아넘어가고, 진영 논리와 편향,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나는 특히 사람에 대해 판단할 때 조심, 또 조심한다. 회사에서는 인사 평가라는 그럴듯한 제도를 핑계삼아 사람을 끊임없이 평가한다. 그런 평가는 인간의 모든 오류와 편파가 들어갈 구석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초기에 저평가했던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보석같은 존재였던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최대한 유보한다. 특히나, 평가나 판단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전적으로 의심하는 양 극단을 조심하면서, 그 사람을 섣불리 좋은 사람, 또는 못 믿을 사람으로 낙인찍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록, 사람에 대한 판단의 영향력과 댓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와 검찰 개혁,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 속에서 동일한 사건과 사안에 대해 극단적으로 다른 시각이 충돌하였다. 나의 소셜 미디어 친구들은 나와 유사한 진영에 속해있고,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기존 진보 진영에서 이 사안을 계기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 극단의 시각이 첨예하게 싸우다보니, 쉽게 내 편과 네 편으로만 편가르기가 되고, 당신의 의견은 내 편이냐, 아니냐로만 단순화되는 것이 참 안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진실 앞에 겸손해야 함을 느낀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 있고, 나도 인간의 편향과 오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새로운 사실 앞에 나의 믿음을 바꿀 수 있고, 진실은 아직 모른다는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2021-04-10

고스트 인 러브

고스트 인 러브 책표지
고스트 인 러브 책표지

나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90년 말에 개봉되어, 엄청난 흥행 실적을 낸 영화인데, 서울에 유학온 나는 대학 시절 '영화관'이란 걸 가보지 못했다. 서울에 와서 초기에 두 가지가 낯설었다. 하나는 지하철이라는 서울에만 있는 교통 수단! 다른 하나는 좌석 예약을 해야 한다는 영화관! 그런 저런 핑계와 그 당시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튼 영화라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래도 라디오에서 하도 많이 나온 음악 언체인드 멜로디는 많이 들어봤던 것 같다.

프랑스의 대중 소설가 마르크 레비의 『고스트 인 러브』를 전자책으로 고르면서, 혹시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고스트가 되어서야 만나게 되는, 어쩌면 뻔하고 진부한 그런 이야기! 이렇게 짐작을 했지만, 그런 뻔한 사랑 이야기를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미권이나 미국, 캐나다가 아닌 유럽, 프랑스 작가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다.

주인공 토마는 피아니스트이다. 작품에서 몇 개의 피아노곡이 나온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너무나 유명한 곡이고, 슈베르트의 즉흥곡도 1번부터 4번까지 모두 언급된다. 빡빡한 연주 스케쥴에 묻혀 사는 피아니스트의 삶의 단편을 조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연주자들이 실은, 밥먹는 시간 빼고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좀 의아했다. 

주인공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죽은 아버지의 유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려나? 싶더니, 아버지의 엉뚱한 요구는 아버지가 못 다한 사랑(그것도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을 살아있는 아들에게 이룰 수 있게 부탁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살고, 빡빡한 연주 스케쥴에 묻힌 피아니스트 아들은 아버지의 엉뚱한 부탁으로 며칠 내로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급박하면서도 리듬감있게 진행된다.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점은 바로 유럽식 대화이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 어머니와 아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간의 대화이다. 전에 보았던 일본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화 방식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장황하지만, 유머가 있고, 외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직설적인 대화!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어서, 원래 원작자가 쓴 말의 뉘앙스를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겠지만, 번역이 매끄러워, 우리말 같으면서도 유럽식 리듬감과 정서가 느껴지는 대화를 엿보는 것이 참 즐거웠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가 사랑했던 그녀를 자식은 어떻게 보게 되는가?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가족들은? 이런 미묘한 사람들간의 만남과 관계 맺음, 거기에서 오는 섬세한 감정들에 같이 동화되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환호를 같이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마르크 레비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아뿔싸! 작년엔가 읽었던 『그녀, 클로이』도 레비의 작품이었다. 뉴욕 맨하탄의 오래된 고급 아파트와 거기에 사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주변 풍경이 살아 움직이듯 묘사가 되어 있어서 나는 당연히 미국 작가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2021-04-06

변두리의 삶과 변두리 로켓

변두리 로켓 책 표지 변두리 로켓 책표지

『한자와 나오키』로 유명한 일본 대중 작가 이케이도 준의 『변두리 로켓』을 읽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고, 원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받은 피터 홀린스의 『어웨이크』를 읽다가 생각보다 내용이 빈약해서 집어던져 버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찾다가 무심결에 고른 책이었다. 

일본의 한 중소 기업 이야기가 나온다. 규모는 작지만, 그 중소기업의 대표는 예전에 실현하지 못한 로켓 발사라는 원대한 꿈을 가진 연구자 출신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현실은, 대기업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생존의 위협을 극복해야 하는 날마다 새로운 위기의 연속이다. 대규모 부품 구매자였던 대기업이 하루 아침에 구매를 끊어버린다든지, 중소기업이 가진 기술을 탐내고 중소기업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특허 소송을 제기해서 못살게 군다든지, 부품 공급을 받기 위해 과도한 심사 절차를 요구한다든지 하는 깡패같은 "갑"들의 행위들이 실감있게 그려진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가는 과정에, 회사 구성원과 이해 관계자들과의 갈등도 너무 생생하다. 일본의 회사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는데, 권위주의와 보신주의, 권한 위임이 잘 안 되는 위계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 어쩌면 한국의 전형적인 회사들과 그렇게 닮았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람은 누구나 변두리에 산다.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의 중심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개인으로서는 세상의 변두리에 머무르고 있다. 변두리와 중심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스스로 중심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하면, 참 우울해진다. 나도 한 때에는 어떤 분야에서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자부심(?) 또는 자만(?)이 가득차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은 변두리에 내몰렸다고 생각하면서, 충만하던 자신감의 자리는 대인 기피로 채워지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소화하고, 로우 프로파일(low profile)을 유지하고 싶은 요즘의 나에게는 어쩌면 코로나19라는 역대급 재앙이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다. 적당히 팬데믹을 핑계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멀리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속의 중소기업인 쓰쿠다 제작소의 대표는, 연구자로서 한 번 실패한 삶에서 변두리 중소기업으로 밀려왔지만, 본인이 품고 있던 꿈과 회사를 이끌어가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 나도 꿈을 버린 것은 아닌데... 문제 해결해가는 과정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쓰쿠다 제작소의 큰 기여로 로켓 발사 카운트 다운이 10, 9, 8, 7, ... 들어가는 장면에서 나도 같이 심장이 쿵쾅거렸고, 마침내 로켓이 하늘로 쏘아올려질 때, 현실의 일인 것처럼 눈물이 났다. 그런 눈물을 흘릴 순간과 사건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포기하지는 말자...고 혼자말을 해본다.



2021-03-21

잘 쉬는 기술

 회사의 동료들이 한참 나가고,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뻑뻑할 때 클라우디아 해먼드의 『잘 쉬는 기술』을 읽었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힘들면서도, 나는 유능해서 그런 것 쯤이야 다 할 수 있다는 자만도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 막상 좀 여유 있는 시간이 되면, 진정 휴식을 취한다기 보다는 그냥 늘어져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아까웠다. 

잘 쉬는 기술 책표지
잘 쉬는 기술(클라우디아 해먼드) (출처: 교보문고)

그래서 정말 주어진 시간만이라도 잘 쉬고, 재충전하고 싶다는 생각에 "잘 쉬는 기술" 책을 집어들었다. 나는 "~기술" 제목이 붙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막상 그런 기술을 따라하거나 적용해보려면 안 되는 이유가 100가지는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목과 달리, 이 책은 기술을 전수하거나 강요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 세계 1만8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10가지 휴식에 대한 사색과 과학적 발견들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만약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다면, 책에서 생각할 거리를 충분히 제공해준다. 

  • 마음챙김 명상은 나에게도 좋은 효과가 있을까?
  • 모짜르트 음악은 듣는 사람들에게 정말 특별한 효과를 내는가?
  •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뇌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란 무엇인가?
  • 소파에 파묻혀 TV만 보는 것은 정말 해로운 것인가?
  • 자연(nature)은 정말로 치료나 치유의 효과를 주는 것인가?
  • 독서를 하는 동안 눈과 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2018-12-14

공간에 눈을 뜨다: 어디서 살 것인가(유현준 저)를 읽고

유현준 저. 어디서 살 것인가 책 표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참 재미있게 보았다. 나는 심한 길치이고, 공간 감각도 둔해서 건축의 세계는 나와는 참 인연이 없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주요 장면들은 사실 공간과 얽혀 있는 것들이 많았다. 비가 오면 걸레로 물이 나가는 입구를 틀어막아 물놀이했던 한옥집의 마당, 따사한 햇볕과 함께 기억되는 한옥집의 마루, 동네 친구들과 자치기하고 구슬치기 하던 흙바닥 골목길, 초여름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했던 주택가, 그리고 서울의 자취집에 가는 정다운 숲길과 같이 공간에 대한 기억과 정서가 깊게 남아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삶과 얽혀 있는 공간이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우리 주변의 공간과 도시, 인간의 삶, 과거의 역사, 미래, 기후, 기술의 발전, 사회와 정치 이야기를 버무려서 재미있게 풀어낸다.

처음에 학교 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나라 학교 건물들은 영락없이 교도소와 비슷하고, 학교 운동장은 사실 군대의 연병장과 비슷하다는 저자의 지적에 아하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학교는 획일화된 건물에서 똑같은 공부만 하거나, 아니면 흙먼지 날리는 연병장 같은 운동장에서 축구만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학생들이 도란도란 모여서 이야기하고, 어울리고, 산책하고, 작은 놀이를 하려 해도, 지금의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오직 획일화된 교실 수업과 몇몇 남자들에게만 즐거운 축구 외에는 다른 것을 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나는 축구를 잘 못 했다. 아니 심하게 못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생일날에 친구들이 나를 즐겁게 해준다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하자고 했을 때 너무 싫었다.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남자이니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해야 할 때가 가장 괴로웠고, 그런 전체주의적 상황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점과 선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공적인 정주 공간(머무르는 공간)이 줄어든 요즘 아이들은 야외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거의 없다. 낮은 천정의 아파트와 천정 높이가 정해진 학교를 벗어나면, 학원에 가기 위해 머리가 닿을 듯한 봉고차를 타고, 다시 천정으로 막힌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봉고차를 타고, 아파트에 와서 꽉막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로 들어가면 4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다. 이런 변화하지 않는 실내에서의 시간들로 꽉 차 있는 상태에서 어떤 공간이 과연 의미있는 경험과 기억으로 남겠는가? 그들에게 변화하는 것이란 오로지 TV와 컴퓨터, 스마트폰 속의 화면 뿐이다. 그러니 변화하지 않는 답답한 여러 실내들(점)들의 단편적인 경험 속에서 신나고 재미있는 변화의 경험은 스크린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요즘에 아이를 데리고 어딘가를 가도 주로 실내 공간이다. 대형 쇼핑몰, 식당, 키즈 카페 등등등. 그런데 그런 곳에 가기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한다. 아이에게는 아파트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가서, 꽉 막힌 차를 타고, 모든 것이 끊긴 채 갑자기 대형 쇼핑몰의 비슷비슷한 주차장으로 장면이 바뀐 것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조금씩만 다른 키즈 카페 실내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에 가기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걸어가며, 주변의 나무가 바뀌고, 풍경이 서서히 바뀌고, 다양한 모습의 상점들이 있고, 넓거나 좁은 길들이 있다가, 어디를 돌아, 어디를 지나 드디어 놀이터에 도착한다는 그런 연속적인 경험을 하기 어렵다. 단지 집, 차, 실내 키즈카페와 같은 불연속적인 공간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도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면 항상 무언가 아쉽다. 연속적인 경험이 끊기기 때문이다. 길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정말 길을 좋아한다. 길을 걸으며 서서히 바뀌는 풍경과 그 길의 고유한 정서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공간 감각이 둔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오는 공간이 별로 없어서 내가 공간에 대해 둔해진 것은 아닌지…

뉴욕에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뉴욕과 같은 대도시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뉴욕에서 놀란 것은 서울처럼 넓은 대로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건물은 높은데, 8차선, 16차선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서울과 달리 뉴욕의 길은 2차선 길이 상당히 많았다. 한편으론 답답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2차선 길들을 따라 풍경이 참 많이 변했다. 길거리 음식이나 기념품을 파는 크고 작은 가게, 센트럴 파크, 뮤지컬 극장, 아리랑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와 같이 8차선 대로에서는 시끄럽고, 바빠서 존재하기 어려운 그런 아기자기한 모습들이 펼쳐졌다. 그래서 비록 도심지의 거리이지만 거리의 모습과 연관되어 그 때의 경험들이 뇌리에 박혀있다.

건축물과 도시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건축과 도시는 다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책의 저자는 화목한 세상을 꿈꾸며 건축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설계된 공간(작게는 주택에서부터 크게는 도시, 공원, 큰 집합 건물, 도로, 다리 등을 포함)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고, 나같이 둔한 사람에게도 공간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 더 뜨게 해 준 좋은 경험을 선물해준 책이었다.

덧붙이는 말: 요즘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함께 걸어 좋은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문구점을 지나서, 장난감집 지나서 학교 가는 길, 너랑 함께 가서 좋은 길… 과 같이 시작되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요즘 아이들이 과연 이런 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할 거리가 있을까?

2018-01-28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갔다 오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전시회 포스터 (2017년 12월 27일에서 2018년 1월 27일까지 용인 포은아트홀 갤러리)
내가 사는 동네에는 포은아트홀이라는 큰 예술 공연장이 있다.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한 일인데, 막상 포은아트홀에서 하는 공연이나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 곳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전, 별 헤는 밤"를 보게 되었다. 윤동주는 시인인데 왜 미술 전시회일까라는 약간의 궁금증으로 전시장에 들어가서 그림들을 한 두 개 보고 있을 무렵, 누가 다가와 책을 한 권 준다. 2017년에 출간된 별 헤는 밤(책)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이다. 윤동주의 시 작품 하나하나를 모티브로 하여 6명의 화가들이 시를 각자의 방식으로 그림으로 탄생시킨 그림과 윤동주의 시를 엮어서 시그림집으로 만든 책이었다. 전시회는 미술 전시회지만, 당연히 시를 모르고 그림만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책을 펼치고, 그림과 짝지어진 원본 시를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그림 감상을 하였다. 처음에는 약간 건성으로 시와 그림을 보았는데, 두 세 작품을 보다 보니 건성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시가 너무 깊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 전시회에 와서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작품 한 작품을 감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윤동주의 시를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상상을 해보았다. 이 시를 읽고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지. 내가 상상한 시의 이미지와 화가들이 표현해낸 그림이 비슷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매우 달랐다. 다시 말해, 흔히 아름다운 시에 투명하고 화사한 수채화 배경 그림이 입혀진 그런 시화전이 아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시인의 문학 작품을 소재로, 21세기 현대 미술가들의 회화가 탄생했지만, 둘은 또 독립적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시장에서 책의 뒷편에 있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소개와 작품 해설 부분을 마저 읽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 군국주의 광기가 극에 달하던 1945년 2월에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윤동주! 그는 작품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기보다, 어두운 야만의 시대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며,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는 젊은 지식인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가 바라는 이상의 세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곳을 그리워하며 노래하였다. 그 이상 세계의 집약체가 "별"로 나타나고, 때로는 "고향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불행한 시대에 한 나약한 학생에게 요구하는 광폭한 도전들에 대해 그는 아침을 기다리는 절대적인 의지와 맑은 영혼을 유지하고자 저항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그의 삶과 작품들에 대한 해설을 정독하고, 다시 작품들을 읽어보았다.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에서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지만, 그의 시는 결코 마술같은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깊은 내면의 성찰이 그의 삶에 투영되고, 다시 그것이 압축되고 조탁되어 탄생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에 나의 짝꿍이 졸업할 때에 자기가 좋아하는 시 여러 편을 노트에 적어서 나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친구인데, 그 때에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시에 심취한 사람들도 있구나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에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된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밥 딜런(Bob Dylan)이 노벨상을 받으면서 그의 노래 Blowin' in the Wind를 비롯한 노래들은 도대체 무슨 가사였을까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영어라는 핑계로 노랫말을 대충 흘려듣고, 노래만 듣기에는 너무 아까운 가사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래에 가사들을 더 관심있게 보게 되었다. 또다른 계기가 있었다. 최근에 나의 아버지가 나이 일흔이 훨씬 넘어서 시인으로 등단하셨다! 아버지가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관찰하고, 경험하고, 습작하는지를 대략 옆에서 바라보면서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꾸준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스케치한 내용을 수 백 페이지의 노트에 정리하고 계셨다. 그리고 집에 가면 나에게 작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평을 해달라고 요청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대 국어의 맞춤법에 비추어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정도의 조언과, 아주 표면적인 감상평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시들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큰 변화였다.
이번 시그림전에서 불행한 시대를 살다가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요절한 윤동주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도 소득이었고, 그런 문학 작품을 화가들은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는지를 엿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였다. 왜 전시회장 벽면에 시를 직접 써붙이지 않고, 불편하게 시집을 따로 책으로 나누어주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책으로 나누어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시와 해설을 정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하나 사서 아버지에게 선물로 보내드려야겠다.

2017-11-26

러빙 빈센트를 보고

Loving Vincent logo
동서고금, 음악과 미술 등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한 명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빈센트 반 고흐를 꼽을 것이다. 그를 처음 접한 것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주셨던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30권인가 50권짜리 명화집을 통해서였다. 화가별로 정리된 명화집에서는 고전적인 앵그르, 다비드에서부터 낭만파의 거장 들라크루아 (그 책의 표기로는 드라크라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수 많은 인상파 화가들, 마네, 모네, 드가, 세잔, 고갱, 쇠라, 그리고 어린 시절 꼬마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고흐의 대표적인 그림들이 해설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고, 맨 마지막은 뭉크 등을 거쳐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렸을 때에는 그저 다른 화풍의 그림들을 보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막연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많은 화가 중의 한 명이었던 고흐가 나의 가슴 속에 들어온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한 번은 2주 동안 네덜란드로 출장 갔을 때, 반 고흐 미술관에 가보았던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 렘브란트, 몬드리안과 함께 고흐가 네덜란드 사람인 것도 몰랐었다. 내 기억에 그 미술관에 고흐의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흐라는 작가와 그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첫 번째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그를 더 강렬하게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살아있는 동안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 수 있었던 고흐는 평생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맑은 영혼을 소유한, 깊이 고뇌하는, 그리고 자연과 인간, 노동에 대해 진실한 존경을 보여주었던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가로서 그는 그림을 통해서 그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하고, 라이브하고, 다채롭고, 역동적이다. 하지만,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들을 통해서, 나는 내가 그림에서 충분히 보지 못했던 그의 생각, 삶에 대한 태도, 조금 더 깊은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이후 그에 대한 노래, 돈 맥클린(Don McLean)의 빈센트는 가장 좋아하는 팝송 이 되었고,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 그림을 배경으로 한 우산을 산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경과 팬심(?)의 표현이었다.
어제 그에 대한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았다. 보고 싶은 시간대에 세 편의 영화가 있는데, 뭘 보겠냐는 아내의 질문에 나는 이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막연히 고흐에 관한 영화겠거니 하고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가서 보게 되었다. 영화 시작할 때 나왔다. 100여 명의 화가들이 참여해 직접 그림을 그렸다고. 그리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흐의 화풍을 재현한 화가들의 그림들이 초당 12 프레임의 애니메이션으로 진행되었다. 책 속에서, 작품집에서 정지되어 있던 고흐의 그림들이 꿈틀대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이 고개를 돌리고, 웅크리고 앉았던 사람이 일어서며, 들판을 달리던 기차가 실제 연기를 뿜어내고 경적을 울렸으며, 그림 속의 등불이 아른거리고, 밤하늘의 별이 휘둥그렇게 빛을 내뿜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가슴이 뛰었다. 특히, 가셰 박사와 아르망의 대화 장면은 마치 고흐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만큼, 라이브한 인물과 배경이 아름다웠다.
고흐 인생의 마지막 거처인 프랑스의 오베르 쉬즈 우아즈에서 그의 삶과 주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절대적으로 침착한(absolutely calm) 상태였다고 고백했던 고흐가 6개월만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과 관련된 미스테리를 우편배달부의 아들, 아르망 룰랭이 추적하는 형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를 통해,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 100명의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서 프랑스 시골 마을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과 배경,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영화 보는 내내 무겁게, 안타깝게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과 함께 빈센트(Starry, starry night으로 더 알려진 노래) 음악이 나왔을 때에는 마치 나의 가까운 지인을 방금 떠나 보내는 것과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고흐의 편지집에는 밑줄 쳐가며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이 매우 많았다. 그가 실제로 부치지 못한 마지막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우리는 그가 생명을 건 작품들을 통해 위로받고 있는 것이다. Thank you, Vincent!

2011-01-17

더 뉴 소셜 러닝(The New Social Learning)을 읽고

소셜 러닝 책표지더 뉴 소셜 러닝(The New Social Learning)은 아마존에서 네 번째로 구매한 전자책이다. 한국 회사들이 해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을 컨퍼런스에 보내는 미국 교육훈련 협회(ASTD, American Society for Training and Development)의 최고 경영자 토니 빙햄(Tony Bingham)과 컨설턴트인 마르샤 코너(Marcia Conner)가 쓴 책이고 ASTD가 출간하는 책 중에 2010년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되었다.

소셜 러닝(사회적 학습) 이론은 원래 심리학에서 앨버트 반듀라(Albert Bandura) 등이 주장한 학습 이론인데, 요즘에는 소셜 러닝이라고 하면 실용적으로 소셜 미디어나 협업 툴을 이용한 집단 학습의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회사 밖에서 소셜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기업 내에서의 소셜 미디어에 대해서는 아직 호의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 소셜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활동하는 것을 학습이라고 하면, 기존 기업 교육 종사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통제하고 주도해왔던 회사 중심의 교육 서비스를 위협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정보보안 부서에서는 회사에서 꺼려하는 정보가 여과 없이 내부에서 유통되거나 외부로 새어나갈 것이라고 걱정하고, 사내 법률가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이디스커버리(e-discovery)와 같은 법률적인 위험성을 경고하고, 조직문화 담당자들은 민감하고 검증되지 않은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나갈 것이라고 걱정한다. 기존에 지식 경영(knowledge management) 활동을 통해 회사가 구성원들에게 각종 회유와 협박(?)을 가하면서 지식을 공유하라고 했는데도 장기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수많은 회사들은 “그것 안 된다”라고 미리 방어벽을 치거나, 아니면 지식 경영에서 실패했던 하향식(top down) 접근을 반복하기 쉽다. 재미있는 것은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2.0 구현에 가장 적극적일 것 같은 정보기술(IT)쪽 부서에서도 투자수익률이 검증되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영자들은 이메일 읽기에도 바쁜데 소셜은 무슨 소셜이냐며,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시킨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부정적인 시각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회사에서 소셜 러닝을 도입하려면 사방에 온통 회의론자들로 둘러쌓인 척박한 환경을 극복해나가야 한다. 특히 산업 특성상 자율보다 규율이 더 중요시되는 금융업, 국방 산업, 제조업, 공공 기관이라면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모든 장마다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응대하는 법(Responding to Critics)이라는 절이 있어서 가장 흔한 비판에 대해 어떤 논리로 대응할 것인지 설명해주고 있다. 이런 대응 논리를 잘 익혀도 아직 “공공의 자산으로서 웹”의 가치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셜”의 가치를 “기업”의 성과 창출과 연결해 설득하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운영의 효율성(operational efficiency)과 비용 절감, 자동화, 구조화에 사로잡힌 기존의 정보기술자들은, 일견 무질서해보이지만 활동 데이터가 쌓이면서 스스로 구조화되고 프로세스가 만들어져가는 소셜 웹을 혼돈 상태(chaos)로 바라본다. 많은 회사에서는 프로세스를 먼저 세우고, 그것에 따라 정보 시스템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 시스템을 잘 만들면 기존에 하던 일들이 자동화되고 그 결과 들어가는 돈이 절약되고, 투입되는 인원이 줄어들고, 시간이 절약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 일이 모두 잘 짜여진 프로세스에 맞추어 자동화될만큼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점점 더 많은 일들은 단순히 잘 짜여진 프로세스나 좋은 선례(best practice)를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똑같은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을만큼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따라서 자동화와 프로세스 효율화 논리만으로는 복잡한 세계에 대응하기 위한 소셜 웹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기 어렵다. 소셜 웹의 시작은 무질서하고 아무런 체계도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활동 데이터가 축적되면 보이지 않던 구조가 드러나고, 없었던 프로세스가 더 현실적으로 생겨나고, 객체나 사람들간의 관계가 아주 소중한 데이터로 다시 활용된다.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인지 활동(예를 들면, 사물 인식, 글자 인식, 얼굴 인식, 의사 결정 등)을 모사하기 위해 if-then-else로 경우의 수를 규명하고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지 활동은 뇌의 복잡한 병렬 분산 처리(parallel distributed processing)의 결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화하면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접근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정도 한정된 데이터와 비교적 의사 결정 규칙이 명확한 곳에는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과 같은 규칙 기반의 심볼리즘(symbolism) 접근을 하는 반면, 아주 단순한 규칙만으로 시작하되 컴퓨터 스스로 학습하면서 지능이 발달하여 수행율이 향상되는 신명망(neural network)을 이용한 접근 방법도 있다. 과거의 정보기술의 패러다임이 다분히 심볼리즘에 가까웠다면, 소셜 웹의 기저 사상은 신경망과 같은 연결주의(connectionism) 쪽에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과거에 기업 혁신을 주도했던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TQM(total quality management), 식스 시그마(6 sigma)와 같이 프로세스와 규칙 지향적인 툴과 방법론에 익숙해진 시각에서 바라보면 엔터프라이즈 2.0과 소셜 웹을 통한 혁신은 초기에 성과도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무질서한 “한 때의 유행(fad)”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책에서는 소셜 러닝이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교육 방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실제 일하면서, 또 일상 생활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협업하면서 배우는 가장 자연스러운 학습 방식을 기술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많은 부분 우리는 자연스러운 협력과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때로는 우연에 의해(serendipity), 그리고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더 많이 학습한다. 우리가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전문성이 향상되고, 여러 가지 비즈니스가 얽혀서 더 복잡해지고, 직급이 올라가 더 복잡한 의사 결정이 필요할수록,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전통적인 교육은 효용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회사 교육 부서에서 만들어내는 교육은 투자대비 효율성이 높고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부족한 역량에 대한 것만을,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루기 때문이다. 특수하고, 전문적이지만 수요자가 없는 교육 영역은 회사에서 제공할 수 없다. 게다가 회사에서 제공하는 교육은 이미 해법이 알려진 문제에 대한 검증된 정답을 알려줄 뿐이다. 미래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즉시 해결해야 하는데, 보통 회사의 교육은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따로 강의장으로 가지 않아도,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성과 향상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방법(EPSS, Electronic Performance Support System)을 통해 실질적인 학습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구호만 있었다. 그것이 2000년대 초반에 회자되던 워크플레이스 러닝(workplace learning)이다. 그러나 그런 구호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회사 교육 부서에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웹 기술의 발달로 자연스러운 협업과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해주는 도구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기술을 활용해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학습을 촉진하고, 학습 결과가 실질적인 조직의 성과로 이어지도록 하자는 것이 바로 “소셜 러닝”이다.

책에서는 소셜 러닝의 필요성과 커다란 사회 변화를 맨 앞장에서 언급한 다음, 딜로이트 회사의 디 스트리트(D Street)라는 시스템을 예로 들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해 소개한다. 사실 과거에 많은 회사들이 CoP(Community of Practice)를 운영해왔지만, 자신있게 성공적이라고 할 만한 곳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커뮤니티’라는 말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2.0 방식의 커뮤니티는 과거의 인위적인 강한 유대(strong bond)를 토대로 한다기보다는 필요에 의해(ad-hoc) 일시적으로 생성되는 약한 연결(weak tie)을 기반으로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카페나 구글 그룹스같은 서비스 모형을 회사 내에 학습 목적으로 비슷하게 도입해 운영하려고 하면, 아무리 인센티브를 주고 별짓을 해도, 대부분은 초기에 반짝하다가 흐지부지 되기 쉽다. 과거의 커뮤니티에서 자료와 데이터가 더 중요했다면 새로운 커뮤니티에서는 그런 자료와 데이터를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하다. 데이터를 만들어낸 사람의 신뢰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축적되게 할 것인가가 관건인 것 같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주제는 비디오를 위주로 한 스토리텔링이다. 이 부분이 가장 공감이 가는 장이었다. ASTD 최우수 교육 사례로 여러 번 소개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에서도 Sun Learning eXchange라는 비디오 플랫폼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사용자들이 직접 만든 비디오가 결국에는 기존 교육 부서에서 만든 콘텐츠를 압도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회사 안에 유통되는 유튜브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비디오를 만드는 작업이 점점 쉬워지고 있고, 회사의 업무가 다원화되고, 특수한 전문가의 지식을 비교적 쉽게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비디오 플랫폼은 매우 강력한 소셜 러닝의 기반이 될 것이다.

세 번째는 마이크로블로그를 통한 소소한 활동, 진행 상황, 지식, 팁, 아이디어 공유였다. 마이크로블로깅은 우리 회사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도 비교적 많이 시도해본 것 중에 하나이다. 한국 사람들은 기업용 마이크로블로깅 사이트에 비교적 비공식적이고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을 조직 문화 관점에서 상하간에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해주는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에 다른 문화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마이크로블로깅을 뉴스나 정보의 공유의 장으로 쓰거나, 물리적으로 또는 업무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부서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큰 협업의 장으로 끌어내서 실질적인 업무의 문제를 해결하는 용도로 쓰려는 경향성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마이크로블로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꺼내는 이야기가 일상적인 잡담을 나눌만큼 한가하냐는 물음이다. 누구든 자신의 이메일 트래픽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메일이 많아지면 그만큼 비생산적으로 바빠진다. 마이크로블로그를 이용해 사내 협업을 하면 이메일 트래픽의 일부를 줄일 수 있고, 개인의 메일함에 모든 것을 정리, 보관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다. 최소한 인스턴트 메신저로 남에 대한 험담이나 잡담을 하는 것보다 공개된 마이클로블로깅은 훨씬 더 생산적이고 건전하며, 예상치 못한 혁신의 도구로 쓸 수 있다.

네 번째는 위키를 이용한 집단 지성의 활용인데 엔터프라이즈 2.0 책에서도 나왔던 미국 정보기관의 위키인 인텔리피디아(Intellipedia)와 이름도 비슷한 인텔피디아(Intelpedia) 예를 아주 자세하게 소개해준다. 아마 요즘에는 대부분 회사에서 크고 작은 위키가 없는 곳이 없을텐데 이것도 은근히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장벽이 많다. 여전히 사람들이 이메일을 통한 비효율적이지만 익숙한 협업을 선호한다는 것이고, 위키에 무엇을 어떻게 공유해야 할 지 모르며, 내가 아는 것을 위키와 같이 공공의 장소에 공유함으로써 나만이 가진 차별화된 가치가 바닥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한 가지 한국적인 특성을 더하면 사람들이 파워포인트로 슬라이드는 잘 만들지만, 위키와 같이 위계적인 제목을 갖는 전형적인 정보성 문서 작성에 서툴고, 사실에 기반하여 이야기를 기술하는 것, 즉 이런 형태의 스토리텔링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 개의 아주 성공적인 활용 사례를 보여주면 상당히 호기심을 보이고 거부감이 적은 것이 또한 위키이다.

다섯 번째로 소개되는 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가상현실 등을 활용한 교육이다. 즉, 위험한 상황이나 직접 실험하는 데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상황을 재현해서 그 안에서 어떤 기술을 익히게 할 목적으로 현실 세계와 최대한 유사하며, 상당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도 혼자 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서로 “소셜하게” 배우게 하는 것이다. 사례로 셰브론(Chevron)사의 정유소 시뮬레이션 등이 소개되었는데, 아이비엠(IBM)에서도 상당히 많이 활용하고 있고, 과거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서도 원더랜드(Wonderland)라는 오픈 소스 가상 협업 툴을 지원했으며 내부적인 리더십 교육에 활용하였다고 한다. 내가 재미있게 느끼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플래시로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현란한 애니메이션은 다 동원해서 교육 콘텐츠를 만들지만, 정작 실제 상황과 유사한 복잡한 시나리오를 담은 시뮬레이션이나 게임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현란하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이 학습자들을 더 몰입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럿이 복잡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시뮬레이션이 더 몰입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마지막 장은 “실제 대면 행사에서 소셜 툴의 활용(Connecting the Dots at In-Person Events)”에 관한 것으로, 컨퍼런스에서 백챗 채널(backchat channel)을 활용해 사람들의 참여 폭을 넓힌다든가, 실시간 비디오 중개를 한다든가, 소셜한 행사 위키 페이지를 제공하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도 우리 회사에서 비교적 많이 실험해보았고 비교적 저항이 덜한 분야이다. 준비에서 사후 지원까지 여러 가지 용도로 쓰게 되는 행사용 위키 페이지를 운용한다든지, 행사중에 의도적으로 백채널을 운용해서 의견을 받고, 기록을 남긴다든지, 집합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간단한 협업 툴(예를 들면, 실시간으로 협업적 글쓰기, 간단한 투표나 의견 조사, 위키를 이용한 조별 과제 수행 등)을 쓰는 것은 쉽게 시도해볼 수 있다.

이미 대세를 넘어 현실이 된 소셜 러닝에 대해 우리 나라 기업들은 아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대신 스마트폰이나 모바일 기기에서 기존의 이러닝 콘텐츠를 그대로 옮겨와 엉뚱하게 “스마트 러닝(smart learning)”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을 많이 보았다. 물론 즉시성과 접근 용이성 측면에서 모바일 기기의 활용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회사 교육 부서에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다 만들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임직원들에게 인심 쓰며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인 시대가 점점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꾸며진 16시간짜리 이러닝 콘텐츠를 보면서 혼자서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학습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회사에서 “필수” 교육이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과정 종료일에 클릭, 클릭하며 페이지 넘기기에 바쁜 사람들을 무수히 봐왔다. 교실 수업에서는 항상 조별 실습도 시키고, 집단 과제도 주고, 토론도 시키고, 발표도 시키고, 좀 더 현업 일에 가깝게 하려고 액션 러닝(Action Learning)을 시도한다. 이런 집단의 욕구를 웹이라는 플랫폼에서 자연스럽게 일상화시키고 표면에 드러나게 해보자. 지금의 웹 기술은 그 정도를 지원할만큼 발전해왔다.

2010-11-29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고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페이스북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우선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개념이 상당히 깔끔하지 못해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또 실제 세계에서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로부터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덜컥 수락하기에는 노이즈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큽니다. 어쨌든 무섭게 성장하고 있고 구글을 능가하는 유일한 인터넷 플랫폼이 되어가는 페이스북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영화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공인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하버드 대학교의 문제 투성이인 심리학과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마음먹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일이면, 학교의 규정, 동료나 친구에 대한 예의, 사회적인 통념 따위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괴짜인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로 “쿨”한 것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예상치 못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지지를 받게 되고, 실제로 기존의 일하는 방식이나 소통하는 방식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는 것! 그것이 마크가 페이스북을 통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반면 공동 창업자인 그의 친구 에듀아도 사브린(Eduardo Saverin)은 아주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으로 영화에서 그와 갈등을 빚습니다. 아무리 쿨한 사이트여도 당장에 광고를 끌어오지 않으면 돈벌이가 안 된다는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지요. 그에 대해 냅스터의 창업자인 숀 파커(Sean Parker)는 오히려 당장의 돈보다는 더 쿨하고 더 멋진 서비스를 만드는 것에 더 재미있어 하는 사람으로 마크가 페이스북을 다른 대학과 다른 나라에 크게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 있는 사람들의 캐릭터와 영화의 캐릭터가 자꾸 비교되었습니다. 제 주변에도 숀 파커같이 재미있고 쿨한 가치를 추구하고, 크고 거친 꿈을 꾸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현실적인 걱정으로 가득차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바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잘 어울리면 정말 멋진 시너지가 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가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쉽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크나 숀처럼 큰 꿈을 꾸고 싶고, 재미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큰 일을 직업으로 삼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그리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금년 초에 미국 실리콘 밸리(즉, 팔로 알토,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등)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라클이 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구글, 기업용 협업 시스템으로 유명한 자이브소프트웨어, 소셜텍스트 등의 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또 팔로 알토 시내를 돌아다니며 전세계 사람들을 열광시킨 여러 가지 혁신의 근원지는 공기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짧은 기간에 그것을 알기도 힘들었고, 말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굳이 그것을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재미”와 “열정”이었습니다. 썬과 같이 큰 회사나, 소셜텍스트와 같이 작은 회사나 모두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너무나 재미있어 하고, 자기들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나눠주고 싶어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재미있어하고, 다른 사람들이 별로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그 일이 앞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고 모험을 하는 스타트업 기업들에게 투자하는 앤젤 투자자들이 미국 사회에는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벤처와 창업 붐이 있었으나, 성공하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 위주로 짜여진 우리 나라의 경제 시스템의 위계 질서에 부딪쳐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저도 큰 기업의 울타리 안에서 모험을 꺼려하고, 기존 질서만을 옹호하는 늙수그레한 중견 관리자가 되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