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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2

기존 의학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우리 몸이 세계라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글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SF작가 김초엽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보건학자이고 전공이 역학(epidemiology)라고 합니다. 역학이 무엇인지는 최근에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알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의학이 개인의 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공중보건학, 그 중에서 역학은 개인의 몸과 질병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좀 더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학문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여성들이 왜 오히려 스트레스 수준이 더 올라갔을까요? 적절한 실내 온도는 21도인가요?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여, 상시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노출되는 건강의 위협, 혈액형과 인종이라는 가짜 과학이 어떻게 차별과 지배의 도구로 쓰였는지, 담배 회사에서 만든 연기 없는 세상(Smoke-Free World) 재단 이야기 등 정말 흥미롭지만, 아픈 의학과 과학의 역사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사실이나 진실로 믿어졌고, 의심 받지 않았던 인간의 몸을 둘러싼 지식들이 어떻게 잘못 생산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생산되지 않았는지 이야기합니다. 요즘 코로나19 백신의 지적 재산권 면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책에서는 그에 앞서 왜 말라리아와 같이 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질병에 대해 신약 개발이 적게 이루어졌는지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중세 서양 의학의 최고 권위자로서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전 받지 않았던 갈레노스 해부학에 대해, 관찰과 데이터와 실험을 통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당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눈으로 보이고, 쉽게 느껴지는 직관에 대해 의심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에서, 인류는 진보하였고, 과학은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을 통해 우리가 함부로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흑인, 여성, 동양인, 중국인을 구분지어 차별하고 낙인찍는 것이 사실은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자들도 약을 꾸준히 먹어 체내 바이러스 농도를 일정 수준 미만으로 떨어뜨리면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HIV 감염인들의 자살은 같은 연령 비감염인보다 10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질병에 대한 비과학적인 혐오와 낙인 때문입니다. 코로나19에 걸린 환자들에게도 혹시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 못한 사람, 사이비 종교에 빠져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쉽게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소수자가 됩니다. 토드 로즈 교수의 《평균의 종말》에서 이야기하였죠. 전투기 좌석을 설계하는 데에 "평균적인 체형"에 맞추면 아무도 맞지 않는 좌석이 나온다고.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이게 "정상"적이고, "평균"이며, "표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우리 몸은 여러 측면에서 다르고, 그것이 비난받고 차별받을 이유는 아닙니다.

2021-05-09

과학자가 쓴 과학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문학의 숲 222회 편지를 보고, 읽어보았습니다. 신뢰하는 사람들이 선택하거나 추천한 작품은, 선택을 후회할 가능성이 낮아서...

처음에는 장편 소설인 줄 알고, 첫 번째 작품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이어 <스펙트럼>으로 들어가면서, 도대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가 한참 고민했었습니다. 전자책으로 볼 때마다 느끼는 문제점이죠. 작품 전체가 잘 안 보이고, 지금 화면에 뜬 페이지의 텍스트가 전부로 보이는 것. 

SF 소설이 현실을 그린 소설과 달리, 현실적인 모순과 제약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주 정복, 우주 전쟁과 같은 다분히 남성 취향일 것 같은 미래 과학 소설 속에 장애인, 비혼인, 동양인 여성, 사이보그와 같이, 주류가 아닐 것 같은 등장 인물들의 시각으로 미래 세상, 지구를 벗어난 우주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설집이 제목으로 쓰인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냉동 수면 기술을 발전시킨 160세가 넘은 노인 과학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따라갔는데, 그게 아니어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전형적으로 과학, 공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이 많은 노인으로 나온다면, 당연히 흰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일 것이라는 고착화된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이 외계 행성에 갈 수 있고, 인간의 특성들이 "개량"되어 완벽에 가까워지고, 감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죽은 사람의 뇌를 시뮬레이션하여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요? 그런 세상에서 "완벽"하지 않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요? 김초엽의 흥미있는 우주 탐험, 뇌 탐험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프로젝트 관리와 간트 차트

간트 차트 예시: 영화 제작 프로젝트
간트 차트 예시: 영화 제작 프로젝트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프로젝트 관리를 하면서 소위 간트 차트(Gantt Chart)가 한 번도 제대로 작동한 것을 본 적이 없다. 20세기 초에 건설 프로젝트처럼 터 닦고, 벽 세우고, 지붕 올리는 순서로 작업들이 종속적이고, 순서가 정해지고 별로 변하지 않는 경우는 어느 정도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사무직/지식 근로자들이 하는 업무가 어디 그런가?

간트 차트의 시각적인 문제점 중에 하나는, 한 행에 하나의 태스크와 하나의 막대(bar)만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엄청나게 많은 공간(가로 시간축으로도, 세로 작업 목록축으로도!)  또는 종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간트 차트가 원래 의도대로 한 눈에 프로젝트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일반 사무직들은 아직도 파워포인트로 간트 차트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보고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런데, 간트 차트의 결정적인 약점(?)을 알아서 잘 보완(?)하는 것을 봤다. 즉, 대충 한 행의 타임라인에 여러 개의 후속 과제 또는 하위 과제 막대를 연속해서 표현해서 오히려 알아보기 쉽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간트 차트로 표현되는 전통적인 프로젝트 관리 방법이 잘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1. 내가 일했던 회사들이 한국적인/동양적인 정서가 강해서, 명시적인 프로젝트 일정과 계획의 이면에 암묵적으로 "유연성"에 대한 동의가 있어서인지  [회사/조직 특성]
  2. 아니면, 내가 일했던 업무가 소프트웨어 제작이나, 공학적 개발과 달리, 비교적 손에 잡히도록 구체화하기 힘든 소프트한(?) 업무여서 그런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업무 특성]

소위 크리티컬 패스(critical path), 또는 크리티컬 패스 방법론(critical path method)을 정교하게 적용해서 프로젝트 일정을 예측한다는 것도, 사실 프로젝트 초기에 디자인 단계에서 하는 대부분의 어림치나 추측(guessing)이 맞다는 가정 하에 작동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어디 현실에서 하나의 작업이 깔끔하게 끝나서 다시 뒤돌아볼 필요 없이 다음 작업이 시작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가? 계속 반복하고, 검증하고, 돌아가고, 피드백 받고, 보완하고, 그것에 따라 다음 작업이 바뀌고, 건너뛰고, 목표가 바뀌고, 예측하지 못한 혁신도 일어나고, 돌발 사고도 생기기 마련인데... 과연 간트 차트가 그런 것들을 관리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일까?

간트 차트를 쉽게 생성해준다는 Wrike의 광고를 보고 문득 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