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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30

호로비츠를 위하여

호로비츠를 위하여 영화 포스터: 엄정화가 연필을 쥐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장면이 진짜 피아노 선생님 같다.

퇴근 후 혼자 오산 시네웰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 다빈치 코드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영화도 있었지만 피아노 영화라는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보고 싶었다. 평일이고 별로 흥행하지 못한 영화인데다 작은 도시의 극장이어서인지 영화관엔 채 10명도 안 되는 관객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주 한적하고 여유있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변두리 피아노 학원 선생님인 지수는 유학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부모를 잃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경민이가 나타난다. 지수는 경민이 음악에 대해 숨은 재능을 가진 소년임을 알고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줄 구세주가 나타난 것으로 기대하고 그를 가르친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귀에 익은 많은 곡들이 나온다. 한 때에는 음악도를 꿈꾸며 피아노를 배우면서 기쁘고, 힘들고, 좌절하고, 지겹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영화 장면과 겹쳐서 지나갔다.

산수국민학교 뒤쪽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수도 피아노'와 '삼익 피아노', '영창 피아노' 소리가 참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수도 피아노의 웬지 서민적인 소리와 삼익 피아노의 조금은 절제된 저음부 위주의 소리보다 고음이 맑은 영창 피아노 소리를 개인적으로 좋아했었다. 그리고 왜 그 당시 피아노 선생님은 "도레미파"를 "도레미화"라고 발음했는지 궁금했었다. 예외없이 바이엘, 체르니로 이어지는 따분한 피아노 레슨보다는 광고 음악이나 만화 음악, 그리고 TV와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온갖 종류의 음악을 흉내내고 변형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또래의 남자 아이들보다 오랬동안 피아노를 배웠던 것 같다.

음악을 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다 지수와 같은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누구는 유학 갔다 와서 콩쿠르 심사 위원이 되고, 누구는 콩쿠르 나가는 아이의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 된다. 그러나 부모를 잃고 세상과 벽을 쌓은 경민의 컴플렉스와 상처는 콩쿠르에 나가서 멋지게 자신의 인생을 빛내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피아노 선생님 지수의 기대를 보기좋게 무너뜨린다. 그리고 찾아오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경민은 갈 곳이 없어지고, 그런 경민을 지수가 키우면서 처음에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음악과 피아노를 매개로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어쩌면 뻔한 결말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몇 번씩이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언제나 큰 소리로 웃으면서 자신의 수줍음을 드러내는 피자 가게 아저씨도 참 매력적이고, 철없는 피아노 선생님 엄정화도 매력적이다. 영화에서도 나왔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악에서 재능과 환경과 운이 따라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부러움은 참 크다. 그리고 다른 분야와 달리 그런 부러움은 성공한 현 상태에 대한 부러움이라기보다 성공하지 못한 요인이 자신의 재능 부족일 것이라는 내적 귀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미를 장식하고, 음악 자체가 주는 힘과 영화의 스토리가 축적해놓은 벅찬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와 넋을 잃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본 가슴 따뜻한 영화, 주위에 권하고 싶다.

2006-04-24

내면에 눌려있는 평화를 일깨우는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책표지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박노자와 같은 분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놀랍도록 감수성이 뛰어난 한 한국인이 우리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일상화되어 느끼지 못했던 우리의 자화상을 너무나도 잘 지면화했기 때문이다. 그런 박노자 교수의 또 하나의 저작,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라는 책의 부제는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이상적인 복지 사회로 부러워 마지않는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을 박노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에서 보여지는 노르웨이의 사회는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 사이의 체계도, 위아래도, 질서도, 권위도 없는 곳이었다. 다만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지, 어떤 사람이 교수라고 해서, 또는 버스 기사라고 해서, 다른 인종이거나, 왕자이거나 심지어 죄수라고 해서 특별히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거나, 권위를 내세우거나, 다르게 대하지 않는 사회! 분명 부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노르웨이 사회의 민주성과 선진성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북유럽 사회의 번영과 평화 이면에 침략의 역사와 제3세계 문제에 대한 외면, 혹은 주변부 국가들의 고통이 있고, 그들의 민주주의는 온 세상에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라기보다는 그들 국가 내부에 한정된 개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꿈꾸기 힘든 좌파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고, 국가에서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소수 지방 언론과 공산당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의견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는 분단의 벽에 가로막히고, 국가 보안법의 올가미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잡혀가고, 혼혈아가 트기라고 놀림받으며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동경스러운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북유럽 사회나 한국 사회를 가리지 않고 인류가 지금까지 문명 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온 폭력에 대해 맹렬히 고발하고 있다. 온건한 민족주의조차도 어떻게 히틀러의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에서, 우리 나라의 현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폭력적 침탈에 시달리고, 분단과 대치, 오랜 군사 독재 통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오래 머물러 있다보니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적 가치와 혼합되고, 은근하게 핏줄과 혈통이 인류의 보편성과 다양성보다 더 중요하게 자리잡아왔다. 특히 이런 잠재된 혈통 집단 우선주의는 최근의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이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으로 변형되어 생산적인 토론과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다른 인종,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배제와 적개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냥, 군복무, 학교에서의 체벌, 동물원에서 죄없이 무기징역을 살아야 하는 야생 동물들, 포르노 영화속의 강간과 같이 이미 만연한 인류 사회의 폭력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맞서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거부하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여 양심적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가 이미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집단, 특히 국가의 명령은 종종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비화되어 군복무는 조국의 부름이 되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우리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향해 힘든 일을 기피하려는 남자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해오고, 우리가 겪었던 폭력에의 추억을 당신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잔인한 논리로 양심과 종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군대에 몰아넣어, 수 천명이 군 내부에서 의문사당하거나 자살하고 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군대의 극단적인 폭력만은 거부하겠다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감옥에 가거나 군대에 끌려가 폭력과 권위에의 복종을 배우고, 실습하고 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심지어 전 사회가 병참 기지로 바뀌기를 진정 원하는 것인지, 여성까지 군복무를 시켜야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성장하면서 내면에 체득해왔던 폭력과 불평등에 대한 자각, 그리고 혹시 어렸을 때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어른이 되면서 까맣게 잊혀져버렸을 우리 마음 속의 평화와 인간 존중의 심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책, 권하고 싶은 책이다.>/p>

2006-04-09

인류의 자랑, 아름다운 인위쩐

왼쪽: 인위쩐과 바이완샹 부부, 오른쪽:메마른 사막에 나무를 심기 위해 양동이로 물을 붇는 장면

수요일 저녁, 회사에서 당직이 있는 날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당직실에 들어갔고, 잠이 오질 않아 TV를 켰다. 수요 기획, 숲으로 가는 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허구같은 감동적인 실화를 접하게 되었다. 인위쩐. 그녀는 나이 스물에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인 '모우스' 사막 가운데에 시집을 오게 되었고, 사방 몇 십 킬로미터 내에 사람은 커녕 마차 한 대도 없는 토굴에서 밤낮으로 악령처럼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피해 살아야만 했다. 사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시집 와서 처음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도 남겨보려고, 사막에 남은 발자국을 그릇으로 덮어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미쳐서 자살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 작은 몸으로 사막의 황사와 싸워 이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시작했다. 19킬로미터나 떨어진 묘목장까지 걸어가 묘목을 사다가 희망이라곤 도저히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위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었다. 인류가 살아가면서 사막화는 더욱 가속화되어간다는데, 그 끝자락을 모질게 붙잡고 나약해보이는 한 인간이 사막을 숲으로 바꾸는 일을 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무를 심기를 20년, 여의도 면적의 9배에 이르는 사막을 그녀와 그녀의 남편 바이완샹이 숲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사막에 나무가 자라니,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들 곁에 오게 되고, 사막은 사람과 나무, 닭과 여우와 양과 같은 생명이 살아가는 정겨운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나무를 오늘도 심고 있다. 중국 당국은 기념비를 세워, 그녀를 중화민국의 자랑이라고 썼다. 어찌 중국만의 자랑일까, 인위쩐은 온 인류의 자랑이다. 오늘 서울에는 올해 들어 최악의 황사가 닥쳐 시가지는 온통 누렇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거나 입을 가리고 황급히 들어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막강한 기술과 자본을 이용해 자연의 갯벌을 없애 새만금 간척지를 만들고, 천성산을 뚫어서 굉음을 내며 고속철이 지나가게 하고, 평택의 평화로운 마을 대추리와 도두리에 포크레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농수로를 부숴 군사 훈련장을 만들고, 백두대간의 숲에 스키장과 골프장을 지으면서 숲과 자연을 파괴할 줄은 알았지만, 인위쩐과 바이완샹처럼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곳을 숲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거대한 자연의 모래 바람에 온몸으로 맞서 사막을 숲으로 가꾼 인위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보기도 참 오랜만이다.

2006-04-03

웹 2.0 시대의 기회, 시맨틱 웹을 읽고

웹 2.0 시대의 기회, 시맨틱 웹 책표지

문서들간의 연결로 이루어진 현재의 웹이 의미적인 데이터들의 연결로 바뀌어,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가 데이터를 생성해낼 수 있는 미래의 이상적인 웹이 시맨틱 웹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시맨틱 웹이라는 말보다 웹 2.0이라는 말이 더 인기있게 오르내린다. 한 때 웹에 관심을 좀 가져보았다고는 하지만, 회사에서 하는 일이 웹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보니 빠르게 변화하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웹 2.0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점점 일상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져가는 즈음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지은이 김중태님은 예전에 박수만님웹 표준 번역서가 나왔을 때 기념 모임에서 뵈었는데 아마 그 모임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직접 기술을 하는 것을 등한시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매우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강연하고 또 캠페인을 하시는 것을 보고 참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맨틱 웹이란 용어를 접한 것은 2003년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였다. 접근성을 파헤칠수록 나름대로의 결론은 의미적으로 견고한 문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졌고, W3C의 다른 문서들을 봐도 시맨틱 웹이란 단어가 항상 등장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시맨틱 웹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호기심을 갖게 된 계기는 Tim Berners Lee 경영국 Royal Society에서 강연한 미래의 웹이라는 비디오를 보고서였다. 그러나, 호기심에서 더 깊은 이해로 발전되지는 못하고, 세월은 흘렀고, 요즈음 나오는 웹 2.0이라는 개념들은 나와는 한참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어갔다. 이 책은 그렇게 둔해진 나의 관심을 다시 일깨우기에 충분한 교양 서적이었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짬짬이 틈을 내어 3일만에 뚝딱 읽을 수가 있었다. 우선은 관심 바깥이었던 블로그, 트랙백, 태그, RSS, Ajax, 유비쿼터스, 그리스몽키, 소셜 네트워크 등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이 반가웠다. 지은이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개념들을 예의주시하고 놓치지 않고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도 책을 읽어보면 어떻게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관심있는 정보만 골라내어 볼 수 있는지 요즘의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웹 2.0 개념이 처음 O'Reilly 사에 의해 제기되었을 때에, 그리고 국내 네티즌들과 언론들이 관심을 보일 때에도 나는 그것이 최신의 기술적 경향들을 억지로 무리지어서 다시 이목을 끄려는 실체없는 상술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던 것 같다. 2.0이라고 붙여도 좋을만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커다란 변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웹을 이용해 서비스나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지 않으면 변화에 뒤쳐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의 말대로 지난 3년을 되돌아보면 엄청난 변화가 우리 생활을 바꾸어놓았듯이, 향후 몇 년에 그런 엄청난 변화를 주도할 기술이 웹 2.0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웹 2.0이라는 약간은 상업적인 용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많은 정보를 어떻게 다루고, 표현하고, 유통하고, 획득하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직 시맨틱 웹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무척이나 많이 해결해야 될 과제들이 있지만, 현재까지 인류가 구현해놓은 많은 기술들만 살펴봐도 미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통찰력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스스로 웹과 관련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일상 생활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2006-03-07

Book review: A theory of fun for game design

Bookcover: A theory of fun for game design

It seemed so exciting to look into the world of game design, and theory of fun at first. It was quite a burden, however, to continue reading it without understanding and capturing the grand pictures of what the author tried to deliver. The author, Raph Koster is one of the most active game designers while the reader, Greg is one of the worst game players. The actual problem did not lie in the ignorance of games but also in lack of extended knowledge to grasp the ideas provided by Raph, the one with vast knowledges ever in the field of game development, cognitive science, social psychology, musical composing, even art. He started his writing with a question, "Why a game has full of fun while the other is just dull?" The introduction of way of how human brain works follows to pave the way for his remaining chapters. He regarded the game as a kind of learning. Therefore it was important to adjust the level of difficulty in a game in order to provide player an adaquate level of learning, problem solving, pattern recognizing, or exploring experiences.

His comparison between games, music, and other performing arts were also insightful, if you have keen interest in human principles of high ordered human behaviours. He closes his book speaking in defense of the importance of game designer against the prejudice of old generations.

I must confess that the book is not a well-organized textbook nor a collection of fact-based theories but it seems to be a combination of various psychological findings and his full-fueled insight. It is not easy to keep the previous things or current topics in your memory to get a little bit better understanding and sense of fun in reading current pages. Sometimes I was confused and lost my ways in his footloose brainteaser. It is a book about fun for game design but is not a comic book easily covered in the crowded subway train.